'바래미'마을의 유래(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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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명 : 바래미 (해저(海底))

 신라시대에는 波羅尾(파라미)라 칭하였다고하며, 마을이 河上(하상)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래미 혹은 바다 밑이라고해서 海底(해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만해도 마을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나왔다고하며, 원래 宜寧余氏(의령여씨)들이 일부 살았으나 조선말기 숙종(肅宗) 경진년(庚辰年 1700)에 관찰사이자 선조이신 八吾軒(팔오현) 金聲久(김성구)선생 (개암공(開巖公) 현손(玄孫)으로 휘는 성구(聲久)이며, 호는 팔오헌(八吾軒)) 께서 지금의 팔오헌 종택 자리에 자리 잡은 것이 처음으로 의성(義城) 김씨(金) 집성촌(集姓村)이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삼백여년 세거지(世居地)로 영.정조(英.正祖) 시대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대소과(大小科) 급재자를 배출하며 영남사림(嶺南士林)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또 일제(日帝) 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산실로써 큰 문중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후학 양성을 위해 實學思想(실학사상)을 가르치던 學麓書堂(학록서당)과 원근까지 명천으로 소문난 큰샘이 있으며, 서쪽(아랫마)으로는 학이 날라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南湖(남호) 金賚植(김뢰식)선생이 살던 南湖舊宅(남호구택)과 映奎軒(영규헌), 김씨 종택이 자리잡고있고, 동쪽(윗마을)으로는 3.1운동 직후 心山(심산) 金昌淑(김창숙)선생을 중심으로 독립 청원서를 작성했던 晩悔古宅(만회고택)과 明月樓(명월루)를 비롯 마을 전체가 口(구)자 전통 와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의성김씨와 타성씨를 합하여 100여 가구가 살고 있으나 조선말기 전성기에는 의성김씨만 100여호가 넘었다고 하며, 1992년 도지정 전통문화 마을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